적의 장례로
끝나는 이야기
아킬레우스 · 헥토르 · 『일리아스』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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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의 질문영웅 이야기는 왜 적의 장례로 끝날까?
자료와 편집 정보
- 다루는 작품
- 일리아스
- 중심 인물
- 아킬레우스 ↔ 헥토르
- 글의 범위
- 작품 장면의 요약과 편집자의 해석입니다. 실제 사람의 진단이나 예측이 아닙니다.
- 작성·편집
- 사람 도감
- 화면 구성 점검
- 2026-10-02
- 정정 요청
- 정식 공개 전 접수 통로를 연결할 예정입니다.
영웅을 노래한 가장 오래된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영웅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적의 장례로 끝난다. 그리고 그 바로 앞 장면에서, 아들을 잃은 늙은 왕과 벗을 잃은 전사, 원수인 두 사람이 함께 운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성을 열 해째 에워싸고 있다. 그리스 쪽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아킬레우스이고, 트로이 쪽의 기둥은 왕자 헥토르다.
아킬레우스는 태어날 때부터 두 갈래의 삶을 알고 있었다. 집에 머물면 오래 살지만 이름 없이 살고, 전쟁에 나가면 짧게 살지만 영원히 기억된다. 그는 뒤쪽을 골랐다.
이 서사시의 첫 낱말은 분노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그는 총대장 아가멤논에게 명예의 몫을 빼앗기자 싸움을 마다한다. 그러자 가장 가까운 벗 파트로클로스가 그의 갑옷을 빌려 입고 싸움터에 나섰다가, 헥토르의 손에 죽는다. 헥토르는 그 갑옷을 벗겨 제 몸에 걸친다.
헥토르는 싸움터로 나가기 전, 아내와 갓난아기에게 작별을 고한다. 아기가 아버지 투구의 깃털 장식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자, 그는 투구를 벗어 땅에 내려놓고 아기를 안아 든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러 준다. 헥토르가 죽고 나면 너의 죽음도 곧 뒤따른다고. 그는 그래도 나선다. 대장장이 신이 새로 벼려 준 갑옷을 입고.
그 전날 밤, 트로이 쪽에서는 폴뤼다마스라는 장수가 성 안으로 물러나자고 권한다. 헥토르는 듣지 않는다. 이튿날 돌아온 아킬레우스 앞에서 트로이 군은 무너진다. 병사들이 모두 성 안으로 달아날 때, 헥토르만 홀로 성문 밖에 남는다. 그런데 아킬레우스를 본 순간 그도 달아난다. 성벽을 세 바퀴나 돌며. 그리고 멈추어 선다.
마주 선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옛 갑옷을 입고 있다. 아킬레우스는 그 갑옷의 어디가 비어 있는지 알았다. 목이 드러나는 틈이었다.
헥토르가 죽는다. 아킬레우스는 그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며칠 동안 끌고 다닌다.
어느 밤, 헥토르의 늙은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홀로 적진에 들어온다. 아킬레우스 앞에 무릎을 꿇고, 제 아들을 죽인 그 손에 입을 맞춘다. 아킬레우스가 운다. 고향에 두고 온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생각하며 운다. 두 사람은 함께 울고, 함께 밥을 먹는다. 아킬레우스는 시신을 돌려주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싸움을 멈추겠다고 약속한다.
서사시는 헥토르의 장례로 끝난다.
가장 강한 전사가 가장 많이 운다. 벗 때문에, 그리고 원수의 아버지 앞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가 달아난다. 세 바퀴나.
영웅의 이야기인데
왜 영웅답지 않은 장면이 이토록 많을까.
왜 일곱 갈래로 읽을까
두 사람을 일곱 개의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이번에는 삼천 년 전의 두 사람이다. 한 가지 성격이나 사건으로 사람을 단정하지 않기 위해 선택·감정·상황·책임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비춰 본다. 어느 한 칸이 정답이거나 더 깊은 단계는 아니다.
영광을 위해 싸운 사람, 지키려고 싸운 사람
몸이 먼저 나간다. 생각보다 칼이, 말보다 분노가 먼저 튀어나온다.
정한 대로 간다. 도시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질 줄 알면서도 나간다.
ESTP는 앞서 송태섭이 선 칸이고, ISTJ는 유중혁, 자베르, 미카사가 선 칸이다.
두 사람 모두 전사지만, 싸우는 까닭이 다르다.
한 사람은 영광을 향해 달렸고,
한 사람은 지키려고 멈추어 섰다.
울 줄 모르는 사람은 화로 운다
이 서사시가 분노라는 낱말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두 번 찾아온다.
방향은 정반대 같지만 같은 분노다. 그리고 두 번째 분노는 사실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다. 벗을 잃은 사람이 그 슬픔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장 익숙한 모양으로 내보낸 것이다.
울 줄 모르는 사람은
화로 운다.
그리고 이 서사시는 그가 마침내 우는 장면으로 흘러간다. 적의 아버지 앞에서. 분노가 다 타고 난 뒤에야, 슬픔이 나왔다.
헥토르 쪽에는 이 서사시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이 있다. 아기가 투구의 깃털을 무서워하자, 투구를 벗어 땅에 내려놓고 아기를 안아 드는 아버지. 전쟁 이야기의 한복판에 그런 장면이 있다.
그리고 가장 사람다운 장면도 그의 것이다. 성문 밖에 홀로 남은 그가, 다가오는 아킬레우스를 보고 달아난다. 성벽을 세 바퀴나.
가장 용감한 사람도
세 바퀴를 달아났다.
그리고 멈추어 섰다.
그 멈춤이 헥토르다. 무섭지 않아서 선 것이 아니다. 무서운데도 섰다.
그런데 그가 처음 성문 밖에 남은 까닭이 용기만은 아니었다. 서사시는 그 순간 그의 속을 들여다본다. 물러나자던 충고를 듣지 않아 많은 병사를 잃었다. 이제 성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그는 그 얼굴들이 무서웠다. 창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그를 성 밖에 세웠다.
가장 용감한 사람의 용기 안에도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이 서사시는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서 헥토르는 동상이 아니라 사람으로 남았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괴물이 아니다. 그는 적의 시신을 끌고 다녔고, 벗의 장작더미 앞에서 사로잡은 트로이 젊은이 열둘을 죽였다. 그가 한 일을 덮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울 줄 모르는 사람의 슬픔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은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끝내 울었고, 시신을 돌려주었다.
분노의 불이 다 탄 자리에 재가 남았다
빛나고, 숨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태운다. 첫 낱말이 분노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움직이지 않고 막아선다. 트로이의 성벽 그 자체다.
명리에서 불은 흙을 낳는다. 화생토(火生土), 불이 다 타고 나면 재가 남고, 그 재가 흙이 된다.
이 서사시의 마지막 장면이 꼭 그 그림이다. 헥토르의 시신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 태우고, 남은 뼈를 거두어 묻는다.
분노의 불이 다 타 버린 자리에
재가 남았다.
서사시는 그 재를 거두며 끝난다.
덧붙이자면, 아킬레우스 하면 떠오르는 발뒤꿈치 이야기는 이 서사시에는 나오지 않는다. 훗날 덧붙은 이야기다. 그래도 명리로 읽으면 흥미롭다. 온몸이 빛나는 불에게도, 약한 곳이 한 점 있었다는 것.
적과 함께 울 때 두 잔의 물이 섞인다
전차. 한 방향으로 내달린다.
탑. 벗의 죽음.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절제. 두 잔 사이로 물을 옮겨 섞는 카드.
황제. 도시를 지키는 기둥.
매달린 사람. 성문 밖에 홀로 멈추어 선 시간.
죽음.
아킬레우스의 마지막 장이 절제라는 것이 이 편의 요점이다. 이 카드 속 천사는 한 잔의 물을 다른 잔으로 옮겨 붓는다. 서로 다른 것이 섞인다.
원수 둘이 함께 울 때,
두 잔의 물이 섞였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벗을 잃은 전사. 서로를 죽이려던 두 사람의 눈물이 한방에서 섞인다. 그 순간, 전쟁이 잠시 멈춘다.
너무 높이 오른 용과, 휘는 들보
아킬레우스에게는 첫 번째 괘, 중천건(乾)이다. 여섯 줄이 모두 양인 괘, 가장 강한 괘다. 그리고 그 마지막 효는 이렇다.
가장 강한 괘의 끝이 뉘우침이라는 것이 주역답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정말로 뉘우친다.
또 다른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저승에 내려간 오디세우스가 죽은 아킬레우스를 만난다. 영원한 이름을 얻은 그가 하는 말을 줄이면 이렇다. 죽은 이들의 왕이 되느니, 살아서 가난한 이의 머슴이 되겠다고.
영광을 고른 사람이
저승에서는 살아 있는 머슴을 부러워했다.
헥토르에게는 스물여덟 번째 괘, 택풍대과(大過)다.
이 괘는 16편의 정몽주가 받았던 괘다. 정몽주는 무너져 가는 고려의 들보였고, 헥토르는 무너져 가는 트로이의 들보였다. 같은 괘에서 서로 다른 효에 섰다.
무너지는 나라의 들보는
나라보다 먼저 휜다.
3천 년 전에도 적의 시체는 돌려줘야 했다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닐 때, 이 서사시 속의 신들조차 노여워한다. 그 시대에도 이것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었다.
삼천 년 전에도
적의 시신은 돌려주어야 했다.
전쟁의 규칙은 전쟁을 막지 못한다. 그래도 전쟁 안에서조차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는 생각은 이렇게나 오래되었다. 그 선을 넘은 사람도, 끝내 그 선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프리아모스가 한 일. 늙은 왕이 몸값을 들고 홀로 적진에 들어왔다. 사신도, 호위도 없이. 그것은 흥정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영웅의 이야기가 적의 장례로 끝난다
아킬레우스가 고른 길은 오래된 물음이다. 짧고 빛나는 삶인가, 길고 평범한 삶인가.
그는 알고서 골랐다. 그리고 이 서사시는 그 선택을 칭찬만 하지 않는다. 저승에서의 뉘우침을 또 다른 서사시에 남겨 두었다.
그런데 이 편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선택이 아니라, 이 서사시가 어디서 끝나느냐다.
영웅을 노래한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영웅의 승리가 아니라
적의 장례로 끝난다.
트로이가 함락되는 장면도, 목마도 이 서사시에는 없다. 마지막 장면은 적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웅을 묻는 장면이다. 이 이야기를 지어 부른 사람들은 이긴 쪽이었는데도.
이긴 쪽이 진 쪽의 슬픔으로 제 서사시를 닫는다. 삼천 년 전에 이미 누군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끝은 승리가 아니라 장례라는 것을.
1940년 무렵, 나치의 군대가 프랑스를 무너뜨리던 때에 철학자 시몬 베유는 이 서사시를 다시 읽었다. 그가 보기에 이 서사시의 참된 주인공은 어느 영웅도 아니었다. 힘이었다.
힘은 그 앞에 선 사람을 물건으로 만든다. 죽이면 시신이라는 물건으로, 죽이지 않아도 떨며 비는 물건으로. 그리고 힘을 휘두르는 사람도 그 힘에 휘둘려 제 자신을 잃는다. 시신을 끌고 다니던 아킬레우스가 꼭 그랬다. 베유는 이 서사시가 위대한 까닭을, 이긴 쪽과 진 쪽의 불행을 똑같은 슬픔으로 그렸다는 데서 찾았다.
힘이 멈춘 방에서만
두 사람은 다시 사람이 되었다.
프리아모스의 방이 그런 자리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도 헥토르를 뒤따라 곧 죽을 운명이다. 그래도 그 하룻밤, 두 원수는 서로를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와 누군가의 아들로 보았다.
삼천 년 전의 두 전사를 두고, 돋보기들은 이긴 쪽과 진 쪽을 번갈아 본다.
이긴 사람이 뉘우치고,
진 사람이 기억되었다.
가장 강한 사람이 울고, 가장 용감한 사람이 달아났다
한 사람은 이름을 위해, 한 사람은 사람을 위해 싸웠다.
분노의 불이 다 타 버린 자리에서 두 사람은 함께 울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긴 쪽이 아니라, 진 쪽의 장례로 끝났다.
너는 슬플 때
화를 내고 있지는 않나.
슬픔을 말할 줄 모르면, 슬픔은 가장 익숙한 모양으로 튀어나온다. 대개는 화다.
세 바퀴를 달아난 헥토르가 잘못한 게 아니다. 무서운 것을 무서워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멈추어 섰다. 용기란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멈추어 서는 것이다.
짧고 빛나는 것과 길고 평범한 것 가운데, 너는 무엇을 고르겠나. 그리고 그 대답은 열 해 뒤에도 같을까.
이 화면에 대하여
이 도감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삼천 년 가까이 된 서사시인데도, 인물들이 하는 일은 오늘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슬퍼서 화를 내고, 무서워서 달아나고, 아기 앞에서 투구를 벗는다.
명리의 화생토, 불이 재가 되어 흙이 된다는 말은 이 서사시가 화장으로 끝난다는 사실과 맞물려서 골랐다.
아킬레우스는 적의 시신을 욕보이고 포로를 죽인 인물이라, 도감의 원칙대로 「괴물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함께 넣었다. 판정 금지 문장은 세 바퀴를 달아난 헥토르를 향한다. 시몬 베유의 글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뜻만 줄여 옮겼다.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는 이 서사시가 아니라 훗날 덧붙은 이야기라는 것을 본문에 밝혔다. 서사시의 문장은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번역본마다 표현이 다르다.
같은 칸, 같은 천간, 같은 카드와 괘를 받은 사람들은 도감 지도에 모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