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러 간 사람과
앉으러 간 사람
프로도 · 대너리스 · 『반지의 제왕』 × 「왕좌의 게임」 · 소설 ×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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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안내 · 작품 장면과 해석을 나누어 봅니다
어디부터 읽어도 괜찮습니다
이번 글의 질문옳았던 사람이 왜 도시를 태웠을까?
자료와 편집 정보
- 다루는 작품
- 반지의 제왕 × 왕좌의 게임
- 중심 인물
- 프로도 ↔ 대너리스
- 글의 범위
- 작품 장면의 요약과 편집자의 해석입니다. 실제 사람의 진단이나 예측이 아닙니다.
- 작성·편집
- 사람 도감
- 화면 구성 점검
- 2026-10-02
- 정정 요청
- 정식 공개 전 접수 통로를 연결할 예정입니다.
둘 다 세상을 낫게 하겠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둘 다에게 큰 힘이 주어졌다.
한 사람은 그 힘을 버리러 길을 떠났고, 한 사람은 그 힘 위에 앉으러 길을 떠났다. 그런데 이 편의 진짜 이야기는 그다음에 있다. 버리러 간 사람도, 마지막 순간에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
프로도는 작은 마을 샤이어에 사는 호빗이다. 세상을 다스릴 힘이 깃든 반지 하나가 그에게 온다. 반지는 그것을 가진 사람을 조금씩 삼켜 버린다. 그래서 모두가 결론을 내린다. 없애야 한다. 반지가 만들어진 산의 불 속에 던지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가장 강한 전사들이 아니라, 가장 작고 약한 호빗이 그 일을 맡는다. 힘을 탐낼 까닭이 가장 적은 사람이니까. 친구 샘이 끝까지 그 곁을 따른다.
대너리스는 무너진 왕가의 마지막 딸이다. 알에서 깨어난 용 세 마리의 어머니가 된다. 그는 노예의 도시들을 차례로 풀어 주고, 사람들은 그를 사슬을 끊는 이라고 부른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조상의 자리, 철왕좌다. 철왕좌는 옛날의 정복자가 용의 불로 적의 칼 천 자루를 녹여 만든 의자다.
마지막에 프로도는 산꼭대기에서 반지를 불에 던지지 못하고, 제 손가락에 끼운다. 반지는 예전에 그가 살려 주었던 골룸이 달려들어 빼앗으면서, 골룸과 함께 불 속으로 떨어진다.
대너리스는 마침내 수도에 이른다. 도시는 항복의 종을 울렸다. 그리고 그는 도시를 불태운다.
대너리스는 처음에 옳았다. 실제로 노예들을 풀어 주었다. 그 힘으로 좋은 일을 했다.
프로도는 끝에 실패했다. 그런데도 세상은 구해졌다.
옳았던 사람이 도시를 불태우고,
실패한 사람이 세상을 구했다.
왜 일곱 갈래로 읽을까
두 사람을 일곱 개의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이번에는 같은 칸, 서로 다른 작품의 두 사람이다. 한 가지 성격이나 사건으로 사람을 단정하지 않기 위해 선택·감정·상황·책임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비춰 본다. 어느 한 칸이 정답이거나 더 깊은 단계는 아니다.
같은 칸에서 힘을 다르게 봤다
끝을 미리 본다. 힘이 사람을 삼켜 버리는 끝을 보았다.
끝을 미리 본다. 사슬이 없는 세상의 끝을 보았다.
앞서 이 칸에 선 김독자, 정몽주, 잔 다르크처럼, 두 사람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보았다.
두 사람을 가른 것은 그 세상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힘을 대하는 태도다.
대너리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 편을 어렵게 만든다. 그는 실제로 그 힘으로 사슬을 끊었다.
힘을 바라지 않는 사람만이
그것을 버리러 갈 수 있다.
그래서 반지는 가장 약한 호빗에게 맡겨졌다. 강한 사람일수록, 이 힘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기 쉬우니까.
곁에 누가 있었느냐
이 이야기에서 가장 정직한 장면부터 보자. 프로도는 마지막에 반지를 버리지 못한다.
몇 달을 걸어 산꼭대기까지 올랐다. 불은 발아래에 있다. 던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는 반지를 끼운다.
버리러 간 사람도
마지막 순간에는 버리지 못했다.
이 장면이 중요한 까닭은, 이 이야기가 뜻이 굳센 사람은 이긴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반지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골룸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골룸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프로도가 여러 번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기 때문이다.
굳센 뜻이 아니라 가엾게 여긴 마음이
세상을 구했다.
대너리스 쪽을 보자. 처음에는 그의 곁에 사람들이 있었다. 조언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벗. 그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죽거나, 등을 돌리거나, 떠나거나.
마지막에 그의 곁에는 멈추라고 말해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프로도의 곁에는 끝까지 샘이 있었다. 더는 산을 오르지 못하는 그를 업고 올라간 사람.
두 사람을 가른 것은 뜻이 아니라
곁에 누가 있었느냐였다.
둘 다 쇠를 향해 갔다
서로 다른 작품의 두 사람이라, 아래의 배치는 이 도감이 놓아 본 것이다.
두 이야기에서 힘은 모두 쇠(金)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하나는 금반지, 하나는 용의 불로 칼 천 자루를 녹여 만든 쇠 의자.
샤이어의 논밭. 흙은 쇠를 품는다. 그는 반지를 품에 안고 다녔다.
사람이 지핀 불. 혼자서는 타지 못한다. 용이 없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명리에서 흙은 쇠를 낳는다(토생금). 쇳돌은 땅속에 묻혀 있다. 그런데 흙은 쇠를 품을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쇠를 이기는 것은 불이다(화극금). 반지는 산의 불로만 녹는다. 철왕좌는 용의 불로 만들어졌다.
쇠를 끝낼 수 있는 것은 불뿐이었다.
그런데 불을 가진 사람은
쇠 대신 도시를 녹였다.
대너리스는 두 이야기 가운데 유일하게 쇠를 녹일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힘으로 철왕좌를 녹여 버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 위에 앉으러 갔다.
기르는 사람이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한 칸
은둔자. 혼자 짊어진 짐.
별. 가장 어두운 곳에서 본 희망. 샘이다.
세계. 한 바퀴를 돌아 돌아왔다. 그런데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여황제. 어머니. 용의 어머니, 풀려난 사람들의 어머니.
황제. 다스리는 사람.
탑. 무너짐.
대너리스의 석 장에서는 한 칸만 보면 된다. 여황제에서 황제로.
두 카드는 3번과 4번으로 나란히 붙어 있다. 여황제는 기르고 품는 힘이고, 황제는 질서를 세우고 다스리는 힘이다. 둘 다 세상에 필요한 힘이다.
여황제에서 황제로 넘어가는
그 한 칸이 전부였다.
어머니라고 불리던 사람이 여왕이 되려는 순간, 그를 어머니라 부르던 사람들은 백성이 된다. 기르던 이들이 다스림을 받는 이들로 바뀐다.
둘 다 불을 품은 괘
프로도에게는 쉰여섯 번째 괘, 화산려(旅)다. 나그네의 괘다. 괘사는 작게 형통하다고 말하고, 괘 전체가 낯선 땅에서의 처신을 다룬다.
프로도는 이겼다. 반지는 사라졌고, 세상은 구해졌다. 그런데 그는 돌아와서 그 집에 살 수가 없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끝내 바다 건너로 떠난다.
집을 지키려고 떠났는데,
돌아와서 그 집에 살 수 없었다.
대너리스에게는 서른 번째 괘, 중화리(離)다. 불 위에 또 불이 있는 괘다.
괘사가 먼저 조건을 걸어 두었다. 부드러우면 길하다. 불은 무언가에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이라, 제가 붙은 곳을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조건이 깨어진 모습이 구사다.
두 괘를 나란히 놓으면, 둘 다 안에 불(☲)을 품고 있다. 여괘는 산 위에 불이 있고, 리괘는 불 위에 불이 있다.
한 사람에게 불은
산 위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였고,
한 사람에게는 불 위에 다시 불이었다.
누가 앉든 내려오게 만드는 것
반지 이야기에는 정치의 오래된 지혜 하나가 담겨 있다. 반지는 힘을 바라는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회의는 가장 약한 사람에게 그것을 맡긴다.
우리 세상의 제도도 비슷한 일을 한다. 다만 방법이 다르다. 좋은 사람을 찾아내는 대신, 누가 앉든 언젠가는 내려오게 만든다.
좋은 사람을 뽑는 것보다,
누가 앉든 내려오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너리스에게 없었던 것이 이 세 번째다. 그의 곁에서 멈추라고 말하던 사람들은 제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었고, 사람은 사라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법으로 보면 분명하다. 항복한 도시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은 우리 세상의 전쟁법이 금하는 일이다. 도시는 이미 종을 울렸다.
덧붙여, 드라마의 이 결말을 두고 보는 사람들 사이에 논란이 컸다.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 급했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 도감은 그 논쟁에 끼어드는 대신, 이야기가 던진 물음 하나만 가져온다. 사슬을 끊던 사람이 어떻게 폭군이 되는가.
좋은 의도는 절대 권력을 견디는가
15편에서 던진 물음이 다시 찾아온다. 목적이 옳으면 수단도 옳은가.
대너리스의 목적은 끝까지 옳았다. 사슬 없는 세상. 그런데 그 목적을 오래 붙들고 가는 사이, 문장이 조금씩 바뀌어 간다.
17편의 라이토가 걸어간 길과 같은 길이다. 내가 옳으니 나에게 맡기라는.
반지의 이야기는 이 물음에 가장 어두운 답을 내놓는다.
아무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아예 들지 않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리고 그 답조차 완전하지 않았다. 들지 않으려고 산을 오른 사람도 마지막에는 반지를 끼웠다. 이 이야기가 끝내 기댄 것은 영웅의 굳센 뜻이 아니라, 친구 하나, 그리고 살려 둔 적 하나였다.
같은 칸의 두 사람이 같은 쇠를 향해 간 길을 두고, 돋보기들이 갈린다.
둘 다 실패했는데,
한 사람의 곁에만 누가 있었다.
버리러 간 사람도 버리지 못했다. 가른 것은 곁에 누가 있었느냐였다
둘 다 쇠를 향해 갔다. 한 사람은 녹이러, 한 사람은 앉으러.
녹이러 간 사람도 마지막에는 그것을 손가락에 끼웠다.
그를 구한 것은 굳센 뜻이 아니라, 업어 준 벗과 살려 둔 적이었다.
네가 가진 힘 가운데
내려놓는 것이 맞는 것이 있나.
반장 자리, 조장 자리, 단톡방의 방장, 동생 앞에서의 형이라는 자리. 작은 힘도 힘이다. 그리고 작은 힘일수록, 이것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기 쉽다.
반지를 버리지 못한 프로도가 잘못한 게 아니다.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한 일은 거기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대너리스에게는 이렇게 쓴다. 대너리스는 괴물이 아니다. 그는 사슬을 끊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두려움이다.
네 곁에, 네가 틀렸을 때 멈추라고 말해 줄 사람이 있나.
이 화면에 대하여
같은 INFJ끼리의 대질이다. 이 칸의 사람들은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보았고, 모두 그 값을 치렀다.
명리에서 둘 다 쇠를 향해 갔다는 것은 이 도감이 놓아 본 배치다. 반지도 철왕좌도 쇠라는 것, 그리고 둘 다 불로만 끝낼 수 있다는 것이 맞물렸다.
프로도를 굳센 뜻으로 이긴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다. 원작이 가장 정직한 대목이 바로 거기라서다. 그도 마지막에는 버리지 못했다.
드라마 결말의 논란은 한 줄로만 다루었다. 작품 속 대사는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같은 칸, 같은 천간, 같은 카드와 괘를 받은 사람들은 도감 지도에 모아 두었다.